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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은간.. | 17/12/15 11:18 | 추천 52 | 조회 1985

[단편] 망각의 버튼 +260 [37]

오늘의유머 원문링크 https://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381011

' 딸각! '

김남우는 길에서 버튼을 하나 주웠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고 둥근 감색의 버튼. 옛날 시골에서 보던 초인종이 생각나는 버튼이었다. 그러나 선을 연결할만한 구멍은 없었다.

" 이런 건 어디에 쓰는 건가 "

' 딸각. 딸각. 딸각. 딸각. '

김남우는 길을 걸으며 계속 버튼을 눌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눌러지니까 누른 것이었다.
김남우가 그 버튼을 누른다는 게 어떤 행위인지 깨달은 건, 택시 안에서였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 속 버튼을 누르자,

" 헉! 누구세요? "

택시 기사가 깜짝 놀라며 옆자리를 돌아보는 게 아닌가?

" 네? 저요? "
" 누, 누구세요? 언제 탔어요? "
" 예? "
" 아니, 난 태운 기억이 없는데..? "
"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봄날 병원까지 가달라고 했잖아요? "
" 아..? 아? 으음..봄날 병원? 어어..? 아? "

택시 기사는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김남우를 힐끔거렸다. 조금은 겁에 질린 듯, 귀신이라도 태운 표정이었다.
그런 반응이 황당한 것은 김남우였다. 혹시 이 택시 기사가 치매가 있는 걸까? 당장 내려야 할까?

김남우는 내려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하며 인상을 굳혔다. 그러다 생각 없이 주머니 속 버튼을 또 눌렀는데,

" 헉! 누구세요? "
" 예? "

택시 기사가 깜짝 놀라며 또다시 김남우를 돌아보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번에는 달리던 차선까지 흔들렸다.
김남우는 기겁하며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택시 기사는 김남우를 처음 본 것처럼 언제부터 탔냐고 묻다가, 돈도 받지 않고 김남우를 내려주었다.

" 뭐야 저 미친 아저씨는? "

밖의 찬 공기를 맡으며 조금 머리가 식은 김남우는 차분하게 상황을 되돌아보았고, 주머니 속 버튼을 꺼내었다.
김남우는 설마 싶은 얼굴이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다시 택시를 잡았을 때 혹시나 해서 버튼을 눌러보았더니, 아까와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게 아닌가?

" 헐 이거 뭐야? "

택시에서 내린 김남우는 황당한 얼굴로 버튼을 바라보았다. 마법의 버튼, 그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김남우는 사람을 대상으로 몇 번 더 버튼을 눌러보았고, 그 능력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버튼을 누르면 나를 보고 있던 모두가 나에 대한 기억을 망각한다. 완전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병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군대 선임도 한순간에 김남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충격적이었다. 군대에서 같이 보낸 날이 얼만데!
군대 얘기를 해줘도 전혀 김남우란 인간 자체를 기억 못 했고, 심지어 당신이랑 내가 왜 문자를 나눴냐며 놀라기까지 했다.
되돌릴 수도 없었다. 다시 버튼을 누르면, 조금 전까지 얘기를 나눴던 기억까지도 까먹고 지나가는 사람 취급했다.

김남우는 약간 상실감 같은 걸 느꼈다. 사람이 잊힐 때는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섭섭하고 허탈했다.
화도 났다. 원래 일자리를 소개받기로 하고 어렵게 나온 자리였는데 일자리까지 날아갔다.

짜증스레 굳은 얼굴로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 김남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 내리기 직전에 이 버튼을 누르면 공짜로 택시를 탈 수 있는 거 아니야? '

김남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면서 버튼을 누르자마자,

" 어? 아..아? 어서 오세요. "

택시 기사는 김남우를 망각했다.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내려도 택시 기사는 전혀 쫓아 내리지 않았다.
김남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버튼만 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김남우는 후드티의 머리를 덮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캔커피 하나를 사는 척하다가 그대로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 어? 어어 손님! 손님! "

당황한 직원이 문밖으로 쫓아 나올 때, '딸각!' 주머니 속 버튼을 누르는 김남우.
직원은 김남우를 코앞에 두고도 누군가를 찾아야한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 어? "

자신이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김남우가 캔커피를 훔쳤다는 기억 자체를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신 김남우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이 버튼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수많은 범죄가 김남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들뜬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른다면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은가?

김남우는 도덕을 배우고 자란 사회의 시민이었다. 들뜨고 신기한 마음에 택시비랑 캔커피 하나를 훔치긴 했지만, 평생 처음 해보는 도둑질이었다.
그동안은 철저하게 사회의 규칙을 지키며 살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정직한 사람이라서였을까,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김남우는 최소한 며칠간은 버튼을 사용하지 않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자신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란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벌이 자신을 정직하게 만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며칠간의 고민이란 것도 고작 이틀의 고민이었다.

김남우는 버튼을 들고 시내로 나섰다. 준비물은 후드티와 마스크, 선글라스.

택시를 타고 내리며 '딸각'.
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고 '딸각'.
옷가게에서 한 아름 쇼핑하고 '딸각'.
커피를 사고 나오며 '딸각'.
전 직장을 찾아가서 부장의 뺨을 시원하게 때리고 '딸각'.

김남우는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김남우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
혹시 나중에라도 기억을 되찾는 건 아닐까 해서 군대 선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혀 몰랐다. 그것이 이 버튼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절대 버튼을 쓸 수 없었다.

" 어휴, 실수로라도 엄마 앞에선 절대 누르면 안 되겠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엄마 선물 좀 가져갈까? "

김남우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안고서 그날의 외출을 끝냈다.
다만, 백수가 돈이 어디서 났냐고 타박하는 가족에게 할 말이 없었다. 어디서 훔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덜컹하기도 했다.
대충 일자리를 구했다며 둘러대긴 했지만, 좋지 않은 눈초리였다.

김남우는 아무래도 현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버튼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겠지만, 친구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김남우는 크게 한탕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버튼이 대단해도 자주 쓰면 꼬리가 밟힌다. CCTV는 망각을 모르니까. 물론 경찰이 찾아와도 버튼만 누르면 된다지만,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크게 한탕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은행을 털자!
영화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버튼만 있으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다. 총이야 사격 연습장에 가서 그냥 가져오면 된다. 은행에서도 돈 가방을 받자마자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가?

김남우는 확실한 계획과 준비를 끝내고, 봐두었던 은행으로 쳐들어갔다.

" 모두 엎드려! "

' 탕! '

" 꺄아악! "

복면의 김남우는 진짜 총의 위협 사격 한 방으로 사람들을 모조리 제압할 수 있었다. 은행 청경이 있는 쪽으로 또 위협 사격을 날려서 상태를 확인하고, 빠르게 창구로 향해 가방을 펼쳤다.

" 야! 너! 1분 안에 현금으로 가득 채워! 1분이 지나면 널 쏠 거니까! "

' 탕! '

" 꺄아악! "
" 빨리! 그쪽에! 너도 빨리 움직여! 너도! "

1분이 넘긴 했지만, 가방은 순식간에 돈으로 차기 시작했다.

" 됐어! 그만! "

김남우는 가방을 잠그고 소리쳤다.

" 모두 나를 봐! "

' 딸각! 딸각! 딸각! 딸각! 딸각! '

김남우는 미친 듯이 버튼을 누르다가 대충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급히 돌아서 달렸다. 완벽했다. 이제 곧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서 주변만 두리번거릴 것이다. 이 간 큰 도둑놈에 관한 모든 기억을 완벽하게 망각하고서!

은행 문으로 나가기 직전, 김남우는 마지막으로 버튼을 눌렀다.

' 딸각! '

한데 그 순간, 달리던 김남우의 걸음이 서서히 멈췄다.

우뚝 멈춰선 김남우는 은행의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난...누구지? "

김남우는 김남우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망각했다. 이십여 년을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었다.
는 지금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울 사람은 없었다. 은행 안의 모두는 영문을 모를 얼굴로 난장판을 정리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도 김남우를 몰랐고, 아무도 김남우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규칙 밖의 인간이란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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