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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하스.. | 18/05/24 11:33 | 추천 70

프랑스의 손석희 +702 [10]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0537860858

1894년, 프랑스 육군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독일의 첩자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드레퓌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영화 빠삐용에도 나오는 가이아나의 '악마섬'에 수감되었다.

드레퓌스

Captain-Alfred-Dreyfus.jpg

드레퓌스가 독일 첩자로 몰린 증거는 단 한가지. 독일군에 보낸 편지의 필체가 비슷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편지의 필체는 프랑스군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던 페르낭 에스테라하지 소령의 필체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에스테라하지가 진짜 독일 첩자였다는 의미)

에스테라하지

Commandant_Esterhazy.jpg


하지만 군부는 이미 드레퓌스를 매장하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드레퓌스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언론을 선동하기가 쉬웠기 때문이고

이미 무기징역을 내린 사람을 다시 풀어주는 것은 군의 위신이 깎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는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에스테라하지의 뒷조사를 벌였고

군부와 에스테라하지가 결탁했다는 증거를 언론에 발표하였다.

한편 그 와중에 에스테라하지는 위베르 앙리 중령과 합작하여 자신을 추적하던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한 증거를 조작한다.

피카르

Picquartweb.jpg

프랑스는 드레퓌스 무죄파와 유죄파로 나뉘게 되었다.

드레퓌스 무죄파는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증거가 없으니 당연히 그는 무죄이며 모든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드레퓌스 유죄파는 군부의 위신이 더 중요하며 유태인이 프랑스에 충성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으로 맞섰다.

그러다가 1898년.

위베르 앙리는 피카르를 엮어넣기 위해 벌인 증거 조작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위베르 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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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의 자살이 결정적이었다.

여론은 이제 드레퓌스 무죄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9년 에스테라하지가 제출한 증거를 모두 무효로 선언한 법원은 재심을 열었는데

패소를 두려워한 군부는 따로 드레퓌스 상대로 협상을 한다.

즉시 사면시켜 줄테니 유죄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그 협상을 받아들였고 드레퓌스 무죄파는 큰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드레퓌스 무죄파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잡았고 기어이 재심을 강행했다.

1904년, 드레퓌스와 피카르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기어이 승리했다.

피카르는 훗날 국방장관까지 올라갔고 드레퓌스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이상,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 대래 알아보았다.



에스테라하지는 영국으로 도망쳤고 그후로도 반유태주의를 전파하며 편안히 살다 갔다.

손석희의 미래가 에스테라하지가 될지, 아니면 앙리가 될지 그것은 앞으로 두고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손석희가 우려먹기 좋아하는 '진실'은 손석희 따위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만큼 허술하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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