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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구스.. | 17/08/14 02:56 | 추천 46

택시운전사 실제 촬영 사진과 최초 무장세력을 알아보자 (약스압) +555 [12]

일간베스트 원문링크 www.ilbe.com/9959252320

문제아 날뛰는 것처럼 개념상실하던 여름도 맛이 가고 있어.


게이들아 그래도 덥다고 영화관가서 광주 왜곡 영화 매출 올려주지 말자.



아다시피 이 영화는 힌츠페터 라는 독일 ARD 방송산하 북부독일 방송

카메라 기자가 1980.5.20-1980.5.21 오후 까지 촬영하여 독일 방송에

나가게 된 광주사태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여 왜곡하고 있어.


그들이 왜곡할 수 없는 가장 중대한 사실 - 자칭 광주 시민군의 무장 시점을

확실하게 밝히려고 해.


글이 많은데, 시간이 없는 게이들은 짤방과 굵은 글씨체를 보면 좋겠어.


퍼가기 좋게 짤방을 2개로 편집했어. 퍼가서 널리 알려줘.


Hinzpeter11.jpg


도쿄 에서 5월19일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 루모어는 통역을 구해서

광주로 내려갔으나,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해.


이들은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고립된 회사 부장을

데리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해.


좌파 거짓말 종특 ㅍㅌㅊ ? ㅋㅋㅋ


첫 짤을 보면 영상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도, 검문 부대 지휘관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어주고 있어.


광주 향토 사단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어.


5월 20일 - 5월 21일 오후까지 취재를 마치고 힌츠페터는 혼자

서울로 돌아와서, 필름을 갖고 독일로 바로 날아가지.


바로 필름 인화해서, 5월 22일 독일 공영 1TV 저녁 뉴스에

한국의 무장폭동 상황이 특종으로 보도 되었어.



그런데, 여기에 좌파의 최종병크 셀프디스가 나오게 되지.


이들이 왜곡하는 자칭 광주 시민군의 무장 시점이 제대로 까발려 진거야.

3번째 짤에서 보듯이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은 아무리 늦어도 5월 21일 오후 3시 이전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부정하기 어려워.


광주에서 서울로 와서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좌파들은, 계엄군의 무차별 학살로 인해, 자신들이 5월 21일 오후

늦어서야 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해.


그런데, 계엄군의 기록은, 이미 5월 19일부터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관측되고 있다고 일선 지휘관들이 보고했다고 해.


부정할 수 없는 기록으로 정리할게.

이 부분은 정규재 TV 에 잘 정리되어 있어.


http://jkjtv.hankyung.com/bbs.frm.view/jkjtv_freeboard?no=3905


20일 4분의 기동경찰과 1분의 계엄군이 순직하였는데도, 계엄군은

전면적으로 무장하지 않았어.


오죽하면, 폭도들이 21일 오전 9시 이동중이던 21시단 사령부의 차량을

공격해서, 빈총들고 있던 장병들은 지프와 트력 17량을 탈취당했어.

압도적으로 수에 밀려 생포된 계엄군들은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었어.



1980. 5월 21일 오후 1시 경, 무장을 갖춘 대규모 폭도들이 전남도청을

장갑차로 공격하면서, 장갑차에 깔려 공수 11여단 권용문 상병이 순직하게 되지.

시위대는 장갑차 공격과 함께 사격도 시작했어.


5월 20일 전남도청으로 돌진하는 버스에 깔려 광주 기동경찰 4분이 순직하고,

전남대 앞에서 돌진하는 트럭에 깔려 계엄군 1분이 순직한 상태여서,

자위 차원의 경비용 실탄을 일선 중대장, 소대장이 소량 지급했고,

계엄군은 달려드는 장갑차와 트럭에 연사로 응사를 하게 되지.


이 과정에서 무장한 폭도들과 교전이 발생하지.


무장 폭도들은, 5월 21일 오후 4시40분 경 부터는 전남대 병원 옥상에

M1917-A4 기관총 2정을 설치했어. 군 복무 필한 게이들은 알 거야.

LMG 기관총 탄환 위력은 M60 기관총보다 한 수 위야. 탄이 더 크지.


이들은 부상병을 후송하기 위해 도청에 접근하는 육군 UH-1 헬기에

기관총 대공 사격을 가하고, 이어서, 전남 도청의 계엄군에게도 기관총

사격을 거리낌 없이 하지.


이 기관총 사격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대규모 전투를 피하기 위해

전남도청을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파악한 지역 계엄 사령부는 도청내

정부 기밀문서의 후송 및 파기를 마치고 철수를 결정하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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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여단소속 통신병 경기만 씨의 증언을 가져와 봤어.

우리 등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측의
장갑차 한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 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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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 대열의 뒷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남동성 상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해.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 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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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상황중 일부 11여단 61대대장 증언중 일부를 또 가져왔어.

그 때 61대대와 62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제일 전면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희
대대에는 장 갑차가 배속되지 않아 전면에 병력들만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시위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 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위대가 몰고 나온 장갑차는
광주 무기고에서 탈취한 신형장갑차로서 바퀴가 궤도로 되어 있지 않고
고무타이어로 된 것이었습니다. (피아트 신형 장갑차)

13시(오후 1시) 경에는 시민들이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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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와 같이 대규모 무장이 가능하도록 무기고를 습격할 수 있는 수준의

최초 무장은 누가 언제 했는가 ?


좌파들이 신봉하는 조선로동당에서 친절하게도 날짜와 시간, 탈취된 카빈 수량도

정확하게 기술해 주고 있어.


그런데 왜 북괴가 그렇게 자세히 잘 알지 ? ㅋㅋㅋ 홍북 일체설



광주의 분노 / 조선로동당출판사,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3. ≪광주민주국≫의 출현

△ ≪총, 총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시내 중심거리에서만 벌어지던 시민들의 투쟁은
5월 19일에

들어와 광주시 전역에로 파급되였다. 5월 19일 오후 3시경이였다.

동명로와 산수3차로사이에서는 500여명의 군중과 ≪경찰기동중대≫사이에

일대접전이 시작되였다. ≪기동경찰대≫는 군중이 밀집된곳을 따라다니며

최루탄을 쏴대며 마구 탄압하였고 군중들은 그에 맞서서 투석전을 벌렸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두시간나마 격전을 벌리던 군중들은 드디여

≪기동경찰대≫를 포위하고 마구 짓조겨댔다.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군중의 기세에 눌리운 ≪기동경찰대≫는 골목골목으로

빠져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놈들이 도망친다! 붙잡아라!≫하고

다급히 소리지르며 골목길들을 봉쇄하였다. 끝내 27명의 ≪기동경찰대≫

놈들이 봉기군중에게 붙잡혔다.


Rioter11.jpg


최초 무장 폭도들은, 기동경찰 복장을 한 상태에서 탈취한 군 트럭을 타고

이동하며 차에 써 붙였듯이 기동 타격대 역할 을 하게 돼.


이들은 이미 파출소 경찰서 등을 털어서 실탄도 확보한 상태였지.


5월 19일에 찍은 사진에는 탄창이 없는 빈총 카빈 이었는데, 5.20-21 사이에

촬영한 힌츠페터 영상에는 모두 탄창을 끼고 있어.


이들은 국군이 빈총을 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군 병력을 습격하여 차량과 무기고를 털고,

518 광주 해방구 수립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이들은 전남대 교수가 주도한 시민 수습위가 무기 반납을 설득할 때 총기를 들고 위협하기도 했어.


또, 간첩 등이 수감되어 있던 광주 교도소 습격도 주도했어.


전남도청 지하에 일대 광주 시가를 날릴 수 있는 TNT 8톤 2100 개에 뇌관을 설치한 것도

이들일 가능성이 높아. 당시 무장 시위대에는 폭약 전문가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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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선동된 광주 시민들은 정신을 조금씩 차리게 되었어.

시민수습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계엄군이 없는 상태에서도 총소리가 5분

간격으로 울렸고, 우발적인 총상, 치정에 의한 총기 살인 등이 이어졌어.


당시에는 일베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애국 일게이가 되었을

전남대 김창길 학생이, 설치된 폭약의 끔찍한 위험성을 알게 되자,

5월 23일 비밀리에 계엄사령부와 접촉했어.


이리 폭발 사고때 활약했던 폭약 전문가 배승일씨가 목숨을 걸고 잠입하여,

김창길 학생의 엄호 하에 전남도청 지하에 설치된 TNT 8톤 폭발물과 수류탄

등의 뇌관을 24-25일 2일에 걸쳐 해체했어.


폭약이 해체되고, 계엄군의 진압이 가시화되자, 이들 초기 무장 세력은

바람과 같이 사라졌고,


사회에 불만을 가진 찐따 32 명 만이 전남도청에 남아 저항하다가 17명이 사살되고

15명이 체포되면서, 붉으죽죽한 광주 해방구는 막을 내리게 돼.


다섯 줄 요약


1. 택시운전사 구라 왜곡 영화임

2. 힌츠페터 영상에 초기 무장세력이 곳곳에 5월 20일 부터 나옴

3. 북괴 조선로동당이 자칭 시민군의 초기 무장이 5월 19일이라고 1985년 발표함

4. 좌파가 물빨하는 북괴가, 생존을 위해 무장했다고 구라치는 좌파 뒤통수 때림

5. 그런데 어떻게 북괴가 광주사태를 그렇게 자세히 기록했지 ? ㅋㅋㅋ 홍북 일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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