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暗然燒魂.. | 15/01/13 16:48 | 추천 76

박정희 혈서가 거짓임을 알려준다. +287 [32]

원문링크 https://www.ilbe.com/5058092035

박정희 혈서의 정체는?

1.일단 신문기사 하나가 있다.

33.png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血書▶◁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

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

で送付されて?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

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

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

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

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

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2. 혈서는 존재하는가?

어떤 이해력 부족한 사람들은 혈서가 일본국회도서관에 보관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알고 있는것이다.

일본 국회 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필름을 직접 촬영한 사진에 불과하다.

44.png

바로 위 사진이 그것이다.

즉 혈서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그에 관한 기록도 없다. 다만 만주신문의 기사내용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동안 '박정희 혈서'는 인터넷 상에서 여러 차례 거론됐다. 많은 연구자들이 만주 지역의 대학이나 도서관 등에서 증거를 찾아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달랑 저거 하나가 유일한 근거이다.

3. 신문기사는 사실보도 인가?


1)기사의 사본에는 '일사에 어봉공 박정희'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라는 내용만 있었다.

여기에는 멸사봉공이란 단어가 없다.


만주신문에 있던 혈서내용은 "일사에 어봉공"(一死以 テ御奉公)이고 일본어로 '잇시이테오호우코우'로 읽는다.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 또는 한 목숨 다바쳐서 충성을 다하겠다. 라고 해석한다. 즉 입학시켜주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2)만주신문의 기사내용도 사실보도가 아니다.

①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 라는 부서가 만주국에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만주 봉천의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을 공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 한번 의심된다 할 수 있겠다.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는 정모과(征募課)라는 부서가 존재했었다.

치안부가 강덕 4년 7월에 탄생하면서 발표된 분과규정에는 징모과라는 부서는 없었다.정모과 征募課라는 부서가 1939년 12월에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진 적은 있어도 징모과徵募課라는 부서는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征이나 徵이나 같은 글자가 아니냐고 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존립시기가 다른 문제이다. 신문기사의 시점인 1939년 3월에는 정모과 마저도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1938년에는 군형과(軍衡課)에서 원서를 접수했고 1940년에는 훈련과(訓練課)에서 전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군형과(軍衡課)와 훈련과(訓練課)는 모두 치안부內 참모사(參謨司) 소속부서이다. 만주신문에서는 치안부 군정사 소속 징모과에서 원서를 접수했다고 하는데, 육군군관학교 편제, 운영 담당은 군정사 소관이 아니라 참모사 소관이다.

그런 고로, 이 신문 기사는 허위에 가까운 창작이다.


②호적등본은 구비서류가 아니었다.

본적지 경찰서장이 확인한 신분증명서로 대체하도록 되어 있다.

③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계 군관모집요강』이라는 것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은 무려 9개월 뒤인 1939년 12월에나 나왔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혈서를 보냈다는 3월 이전에는 일계 학생은 뽑지도 않았고 만계 학생들만 선발했다. 바로 이런 점이 이 신문기사가 소설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일계(日系) 지원자 모집공고는 陸滿秘 공문 제1019호 (昭和 14年 11월 28일자)에 최초로 기안된 사실이 있다. 昭和 14年이면 1939년 11월 28일자였다. 그러므로 39년 3월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39년 12월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 일계모집요강을 신문기사에 나오는 박정희가 받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계" 모집공고는 "일계"와는 구분하여 고시되었다. "일계"는 육군성 대신의 추천을 받은 자들에 대한 무시험 전형이어서 박정희는 전혀 대상이 아니다.


④ 만주 신경군관학교 지원 시기의 문제

강덕6년(1939년) 8월에 기안된 만주군관학교예과생도 모집책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박정희는 이 책자를 보고, 그해 10월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1940년 4월에 2기생으로 입교한다.

112.png

1939. 8 모집요강 기안

1939. 10 모집 시험에 응시

1940. 4. 신경군관학교 예과 입학

1942. 3 우등생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 푸이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으로 받음

1942. 10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

1944. 4 일본 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

1944. 12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

1945. 7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

* 1938년 10월 1기 모집 시험

1939년 2월 24일 합격자 발표

1939년 3월 29일 만주신문 기사 내용에 있는 문서 도착

따라서 1기 시험에 응시했다고 해도 합격자 발표 이후의 응시서류 도착이고 1기 시험인데 2번째 도전이라고 했으니 기사내용이 허위이다. 2기 시험에 응시할 서류라면 서류접수 자체가 안되는 시기였다. 1938년 8월에야 모집요강이 나갔기 때문이다.

혈서라고 주장하는 신문기사 내용자체가 엉터리이다.

이제 남은 것은 조 모기자가 주장한 혈서 내용이다.

유증선의 주장을 토대로한 주장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썼다는 주장은 문경 보통학교(문경 서부공립 심상소학교)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의 증언에 기초한다.

유증선의 증언 내용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②혈서 작성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 사실 : 호적을 고치지 않았다.
일단, 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은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를 확인해보면

보면 응시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되어 있다.
응시연령.jpg

유증선이 증언한 바 당시 1938년 5월이면 박정희 나이가 22세일때인데, 한 두살 낮춘다고 응시자격이 생겼을리가 없다.
또한 당시에는 모집 여부를 알수 없었던 시기였다. 모집요강이 1938년 하반기에 나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5년제 대구사범학교의 군사교육(교련교육)을 마침으로써 하사관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예과

사관학교를 지원하는 자로서 하사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26세미만이면 입학이 가능했다.

하사관.jpg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제 음력 생일과 같다.

나이.jpg

그리고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23페이지에 실린 박정희의 구미보통학교 1,2학년 성적부에는 대정(大正) 6년(1917년) 9월 30일(음력)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력으론 1917년 11월 14일이다. 박정희는 나이를 고치지 않았다.

②혈서 작성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 해 가을(1939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 실제 사실 : 혈서가 만주까지 가는데 1주일 걸린다고 하였으니 38년 5월에 만주지역의 어떤 신문에 보도가 되었을 것이다. 만주일보 어디에도 그런 기사는 없다. 또한 만주일일신문에도 나와있지 않다.

1938년 5월에 혈서를 작성했다고 하는데, 1기 입학시험은 38년 10월에 있었다.
1938년도 1기 가을 시험 응시도 아니고 그 다음 해에 치룰 입학청원 편지를 썼다는 증언은 의아할 따름이다. 1939년도 만주군관학교 2기 입학시험일자는 10월3일로 아직 시험공고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훨씬 전에 입학청원 혈서를 보냈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는 맞지 않다.

만약 박정희가 혈서를 썼고, 만주에서 발행된 신문에 보도 되었다면 만주로 가기 전에 남로당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에서 발행된 그 어떤 신문기사도 현재까지 없다.
어떻게 박정희가 귀국하자마자 남로당이 VIP 특별대우를 하며 박정희를 추종하였겠는가?

박정희가 아직 만주에 있었을 때도 광복군이 달려와 그를 광복군 중대장으로 영입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런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만주국의 선무공작 차원에서 보도자료 배포를 통해 당시 만주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늦어도 1주일 이내에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문들도 단 한 줄이라도 언급했을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세력들의 지탄으로 인해 풍문이 돌았을 것이지만 혈서사건은 야사에도 전하지 않는다. 일본으로서도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정부차원에서 기록에 남겼을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증명되지 않고 있다.

다른 증언:
정용진이 쓴 '청년 박정희'에 의하면 박정희는 1939년에야 고향선배 상위 강재호의 조력을 받아 입학 청원편지를 썼다고 한다. 당시 군관학교 입학응시 자격은 4년제 중학교 졸업자면 됐기에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졸업한데다가 교련이수로 하사관 계급이 주어졌음으로 나이제한 기준초과를 용납해 줬을 것으로 보는게 더 설득력이 있다.


박정희는 5년제 대구사범학교의 군사교육(교련교육)을 마침으로써 하사관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하사관 박정희의 군관학교 입학자격과, 입학적령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박정희가 굳이 혈서까지 쓸 이유는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까지 써가면서 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했다는 소설이다.

만주국은 일본에 우호적인 국가였다. 전쟁말미에 초급지휘관이 많이 필요했던 시점에서 박정희가 고개 숙이면서

입학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요약:
박정희 혈서는 마이크로필름 신문기사와 유증선 증언, 2개 모두 사실이 아니므로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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